서재필 박사(Dr. Philip Jaisohn, 1884 –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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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는 근대 개화기 민족의 선구자이자 애국 독립운동가였으며,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과 의사면허를 받아 미주 한인사회의 기념비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구한말 부터 해방 직후까지 역사의 시련기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서재필 박사는 오늘날 미주 한인 동포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남기고 있다.

  

출생과 성장

 서재필은 고종이 왕위에 즉위한 해인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울로 유학한 그는 18세가 되는 해인 1882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울에 유학 하면서 서재필은 개화파의 중심 인물인 김옥균을 만나게 된다. 김옥균은 12세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당시 개화파는 서울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봉원사에서 비밀리에 ‘개화당’을 결성 하였는데, 이때 서재필은 20세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일본유학과 갑신정변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김옥균은 1883년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 등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약 1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 설립을 간청하였으나, 청나라와 손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884년 12월, 명성황후 중심의 집권 세력과 긴장관계에 있던 개화파는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들은 ‘우정국’ 설립 축하연에 참석한 집권 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여기에 일본유학 사관생도들이 행동 전위대로 나섰다.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점령관으로 내정되었다. 개화파는 ‘혁신정강 14조’ 선포하고, 청나라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평등권의 수립, 탐관오리 처벌, 국가재건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에서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진압하므로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정부는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부모형제 등 서재필 일가를 몰살 시켰다. 그의 부인은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자결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에서 냉대를  받았다. 일본은 이들의 송환을 비밀리에 추진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서재필은 1885년 5월 마침내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훗날 서재필은 회고를 통해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다. 첫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philip_jaisohn_and_muriel_armstrong_in_1930s미국에서의 교육과 결혼

낯선 미국땅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남들이 하루 5마일 뛸 때 서재필은 10마일을 뛰어다닐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저녁에는 YMCA 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이때 서재필은 홀렌백(John W. Hollenback)이라는 펜실바니아 출신 사업가를 만나게 되는 데, 그는 서재필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1886년 서재필은 펜실바니아 Wilkes Barre에 도착하였다. 그곳 명문 고등학교인 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고별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과 함께 있게 되어 그로부터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백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조선에 선교사로 간다면 모든 학비를 대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역적으로 몰려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자기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홀렌백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Lafayette대학을 중퇴한 후인 1888년 1월, 서재필은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 의무총감실 소속 도서관의 빌링스(Billings) 박사 밑에서 중국 등에서 출판된 의학서를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이때 그의 영향을 받아 의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빌링스 박사는 훗날 죤스 홉킨스 의과대학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마침내 1889년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의 전신) 야간학부에 입학하여 1892년 한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M.D.)가 되었고, 1893년에는 정식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에는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되는 데, 당시 아시아인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에는 정부 의학연구소에서 병리학과 세균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어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당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서재필은 1894년 뮤리엘(Muriel Armstrong)을 만나, 같은 해 6월 워싱턴포스터지 등 당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은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며, 그의 아버지는 미국 15대 대통령 James Buchanan과 이종사촌 지간이었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은 두 딸을 두었다.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 건설

independencenewspaper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 전에 헤어졌던 박영효를 워싱턴에서 재회하였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귀국하게 된다. 그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명성황후 일족이 실권하고 개혁내각이 들어서면서 갑신정변 연루자들의 죄가 사면되었다. 개혁 내각은 서재필에게 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신문발행 작업에 착수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가 민중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바로 민중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을 발행하였다. 일본은 독립신문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할 것을 우려하여 서재필에게 암살위협을 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조선 인민이 남녀, 상하, 귀천의 구별을 떠나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게 됨으로서 조선의 지혜가 진보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교육, 민주주의, 산업개발의 중요성과 여성평등, 악습폐지, 공중보건 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에서 이권 다툼을 벌이던 러시아와 일본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부정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재필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나가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학생 토론회 조직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중에는 이승만, 주시경 등이 있다. 이승만은 처음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서재필로부터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적 자유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독립신문사에 취직하여 한글 조판을 담당하면서, 나중에 그가 만든 ‘조선어 문법’의 토대를 쌓았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한글 띄어쓰기를 도입함으로서 문법의 기초를 놓았다.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의지를 공표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고 그 옆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여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문 뒤쪽에 있던 중국을 숭상한다는 말 뜻의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을 세웠다.

여기서 서재필이 말하는 독립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이다. 초기에는 안경수, 이상재 등이 중심인물로 참여하여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고, 나중에는 대중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독립협회 토론회가 한 단계 발전된 것이 1898년 12월 부터 개최된 ‘만민공동회’이다. 만민공동회는 독립관에서 열렸던 토론회와 달리 서울 종로 한 복판에서 열려 일반 대중이 대규모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 일본, 독일 등의 부당한 이권요구를 좌절시키는 실질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를 대여하여 쓰겠다는 러시아의 요구를 무력화 시킨 것이다. 이러한 만민공동회의 성공적 개최로 그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도산 안창호가 감명을 받아 평안도 만민공동회 지부를 맡아 활약하였다. 서재필과 안창호는 그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의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렇게 서재필이 개혁활동을 벌이자 조선의 보수파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본과 러시아도 미국정부에 서재필을 미국으로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조선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서재필은 미국의 장모가 위독하다는 다급한 전보를 받게 된다. 그는 돌아와서 장모가 그런 전보를 보낸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발신자를 추적한 결과, 러시아측이 서재필을 조선에서 내쫒기 위해 미국인을 매수하여 전보를 거짓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서재필은 미국에 돌아와서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잠시 참전한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몇 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1905년부터는 출판 및 인쇄사업을 시작하여 70여명의 직원을 둔 사업체의 사장으로 성공하였다. 당시 그는 필라델피아 실업인협회의 재무이사로서 사회발전에 공헌 하였으며, 로타리클럽, 프리메이슨 등의 회원으로 활약하면서는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정치인과 언론 및 종교 인사들과도 많은 교분을 쌓았다.

memorial1905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이승만 등 젊은이들이 서재필을 찾아와 조선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자고 하였다. 서재필은 이들과 함께 청원서를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재필은 청년들이  독립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내가 뿌린 독립의 씨앗들이 열매를 맺고 있다”고 감동하였고, 조국을 위해 장차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훗날 회고 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부터이다. 3.1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과 더불어 필라델피아에 한인들을 소집하고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4월 14일 부터 사흘 동안 Little Theater(현재는 Plays and Players Theatre)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140명의 한인들을 비롯하여 여러 미국인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그 중에는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제임스 딘(James Dean) 빌라노바대학 총장 등이 있다. 필라델피아 시장은 대회 직후 한인들이 비를 맞으며 150년전 미국독립 선언을 채택한 독립기념관 까지 행진할 때 기마대와 시악대를 보내 격려해 주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을 하게 되면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결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과 미국 국민 및 정부에게 보내는 호소문도 채택하였다.

서재필의 제1차 한인의회 직후 ‘한국 친우동맹(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n)’을 결성하였다. 톰킨스 목사를 회장으로 1919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이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오하이오 주 등 여러 주에 20여개의 지부를 두었다. 나중에는 영국 런런,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지부를 세웠다. 추산 인원 25,000명의 회원을 가진 친우동맹은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국무장관이나 상원의원 등의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정부가 한국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0년 3월 1일에는 뉴욕지부 주최 3.1운동 기념행사가 뉴욕시에서 열렸는데, 1,000여명의 미국인들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의 필라델피아 사무실에 ‘한국 홍보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립하고, 매월 2,000부가 넘는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를 발행하여 정부기관, 대학, 교회 등지에 배포하였다. 여기에 여러 미국인들도 필자로 참여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였다. 1921년 서재필은 당시 대통령 당선자인 하딩(Warren Harding) 등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워싱턴에서 열릴 군축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라는 문건을 제출하였는데, 군축회의에서는 일본의 방해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지만, 대신 미국 상원에서 공식의제로 채택되었다.

워싱턴 군축회의가 끝날 즈음, 서재필은 심각한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독립운동으로 사업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 데다가 많은 개인재산이 지출되었는데,  1920년대 당시 금액으로 70,000달러가 넘었다고 한다. 1924년 서재필은 결국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던 집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1925년에 인근의 소도시인 미디아(Media)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 집이 지금의 ‘서재필기념관’이다.

 

의사 생활의 재개

서재필은 1926년 펜실바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오랫동안 손에서 놓고 있던 의학공부를 재개하였는데, 그때의 나이가 벌써 62세였다. 전문의 및 병리학자로서 서재필은 영국왕립의학 저널을 비롯한 여러 저널에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34년에는 과로로 폐결핵 진단을 받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1938년 비로소 개업을 했고 동시에 여러 학교나 주립기관에도 의사로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그는 또 자기가 살고 있는 미디아시의 신문 ‘Media News’에 국민건강을 위한 기사를 정기적으로 게재하는 등 미국 사회에도 공헌하였다. 한편 50년 가깝게 서재필을 내조했던 부인은 1941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생계에 곤란을 겪으며 의업에 매진하면서도 서재필은 결코 한국을 잊지 않았다.  1926년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부각시킨 것을 비롯하여, 꾸준히 신문, 잡지에 기고를 하였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1941년 미국과 일본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징병검사관으로 3년 남짓 자원봉사를 하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믿었고, 미국이 일본을 이김으로서 한국이 독립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1945년 서재필의 공로를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하였다.

 

고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날들

한국이 해방되자, 서재필은 1947년 7월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50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된다. 처음에 미군정의 초청을 받고, 서재필은 “나는 지위도 원치 않고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국민 교육에 있다.”는 말로 뜻을 밝혔다. 1948년 5월에는 초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백인제 등을 중심으로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요구는 한국사회에 이념적, 정치적 갈등을 고조시킬 수 있었기에, 또  84세의 고령인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서재필은 정치에 뜻이 없었고 무엇보다 정국이 우선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다는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지자 미군정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서재필은 “국민들이 원해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뜻에 따라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1949년 3.1절에 서재필은 기념사를 녹음하여 한국에 보냈는데, 여기서 서재필은 남북한이 조속히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마지막 염원은 정반대의 현실로 나타났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재필은 큰 충격을 받았고,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부근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서재필 박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이자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애국자로서 몸을 바친 그의 일생은 민중계몽 운동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뿌리를 조국에 깊이 심고자 하는 열망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의학도로서의 본직은 늘 희생되었다. 그는 인생 여정 동안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과 의사로서의 본직, 두 개의 갈림길에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의사로서의 안락한 생활이나 연구활동을 포기하고 조국을 위한 애국의 가시밭길을 택하였다.

 

*** 이 글은 본 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고 현봉학 선생이 쓴 ‘서재필의 생애와 사상’ (2000년)과 동 재단이 발간한 소책자인 ‘서재필 박사의 위대한 일생’(2014년)을 정리한 내용임.

*** 게재된 동영상은 동 재단이 주관한 2015년도 ‘서재필 비디오 콘테스트’에 입상(Solomon Cho)한 작품임.